주요 내용으로 건너뛰기

이별

영화선모




/

묵혀둔 이별을 먼저 꺼낸건 선모였다. 



말라버린 화분이 외롭고 괴롭게 창가에 매달려있었다. '영화♥선모' 라고 삐뚤빼뚤한 글씨로 적힌 이름표는 누렇게 바래있었다. 둘의 사랑은 이미 식어버린지 오래였다. 누구보다 잘 알고있던 서로였고 그랬기에 더욱이 말을 꺼내지 못했다. 누군가 먼저 말해주길 바라며 하루하루를 썩어가고 있었다. 식어버린 감정은 침대 위에서나 다시 달궈졌고 타올랐던 마음은 점점 빠르게 식어갔다. 헤어져야 할 때가 왔음을 알았다. 없는 감정을 지어내며 관계를 이어갈 필요도 없었다. 그럼에도 둘 다 용기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어서 관계를 끊어내지 못했다. 



"오늘 늦어요."

"어, 나도."

두껍던 포장이 한겹 더 벗겨졌다. 어느 누구도 진짜 사랑을 원하지 않았다. 지치고 낡아서 이제는 네게 줄 사랑이 없다고 말을 꺼내기가 두려웠다. 그것은 비어버린 마음을 보여주기에는 너무 부끄러운 자신임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이제 사랑대신 관계를 이어주던 정 마저도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다. 소중하고 사랑했던 사람인데 고작 이러려고 만났나 싶어 울었고 잊어버리고 싶지 않았는데 잊혀져가는 추억이 안타까워 울었다. 나눴던 사랑이 아까워 헤어지지 못했다. 적어도 윤영화는 그랬다. 제가 쏟아부은 시간과 돈이 아까워, 사랑이 아까워, 감정이 아까워. 그리고 자기를 사랑해줬던 문선모가 아까워.



억지로 사랑하는 기분이었다. 각자에게 세뇌시켰다. 나는 문선모를 사랑한다고, 또 윤영화를 사랑한다고. 헤어지고 나서야 후회를 할까봐 두려움에 이별하지 못했다. 익숙함에 속아 소중함을 잊었을까 걱정되어 고백하지 못했다. 어쩌면 권태기가 아닐까하는 작은 희망은 아직 남아있었다. 그냥 옆에 있으니까 함께 했던거고 연락이 왔으니까 대답을 할 뿐이었다. 누구보다 초라한 이별을 맞이할 준비를 시작해야했다. 잠시 멈춘거라고 생각한 사랑은 영원히 끝나버렸다. 아무리 노력을 해봐도 끓어오를 생각이 없는 마음은 이미 서로의 것이 아니었다. 헤어지고싶은 이유는 많았지만 막상 입 밖으로 꺼낼만한 근사한건 없었다. 자존심을 굽히지 못해 모진말로 대신했다.



"내가 무슨 말 하려는지 알죠."

"어."

윤영화는 고민했다. 그렇지만 티를 내지 않았다. 모른다고 말하고싶었는데 정작 퉁명스럽게 어, 하고 대답해버렸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문선모도 꽤 당황한듯 싶다. 조용한 그 틈에 윤영화는 눈으로 집을 훑었다. 둘이 함께 지내던 집이 너무 낯설었다. 유리창으로 비쳐오는 햇빛이 부드럽지 못하고 쓰라렸다. 날씨가 쌀쌀해져 이제 외출을 하고 돌아오면 바깥냄새가 한참을 맴돌았다. 지금 선모한테서 나는 냄새였다. 



"그럼... 우리 그만해요."

"어."

선모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마지막까지 성의없네, 씨발... 비웃듯 따라붙은 말 한마디에 가시가 돋았다. 진짜 끝이라는 신호를 보내는 것 처럼 들려왔다. 혼자 씩씩대나 싶더니 이내 등을 돌려 나가버린다. 윤영화는 그대로 멈춰 문선모가 떠나간 자리를 한참이고 멍하니 쳐다보다가 급하게 따라나섰다. 슬리퍼를 신은 탓에 발로 부딪혀오는 바람이 시려웠다. 겉옷도 걸치지 못해 몸이 으슬으슬 추웠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걸 곁눈질로 보고나서 계단을 뛰어내려갔다. 코 끝이 시려오며 붉게 물들었다. 갑자기 영화의 발이 멈췄다. 우뚝서있는 영화의 시선 끝에는 계단에 쭈그려앉아 고개를 파묻고 울고있는 선모가 있었다. 손을 뻗고싶지 않았다. 하고싶은 말, 다정하고 따뜻한 말이 많이 있었는데도 날이 추운탓에 밖으로 나오지를 않았다. 인기척에 문선모가 고개를 들어 윤영화를 바라본다. 붉어진 눈가와 달아오른 두 뺨이 안쓰러웠다.



"그니까... 너... 짐, 언제 뺄거냐고."

어처구니 없는 말이었다. 선모의 눈물이 쏙 들어갔다. 질린다는 표정과 함께 피가 차게 식었다. 더 구질구질 해지기도 참 어려운 일이었다. 어쩌면 윤영화가 일부러 이러는 거라고 착각마저 하게 만들었다. 영화가 한 칸 위에 올라서있음에도 불구하고 선모의 머리통이 조금 더 솟아있었다. 내일 뺄게요. 차가운 한마디를 던지고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가는 뒷모습을 다시 잡기에는 너무 미련했다. 윤영화는 아직 헤어짐에 익숙하지 못해서일까. 그니까, 윤영화는 법적으로 이혼을 하고 도장을 찍는 일이 아니라 진정으로 헤어진다는 걸 잘 모르는 사람이었다. 아직 채 돋아나지 못한 새 살에 뜨거운 물이 닿아 또 상처를 입는 바람에 남을 돌볼 여유따위는 사라졌다.



헤어지고 나서도 지구는 열심히 돌았고 내일은 찾아왔다. 해가 뜬다는 표현보다 지구가 한 바퀴 돌았다는 말을 쓸 때 비로소 그 노력이 가당케 느껴지는 것이다. 출근을 해야했고 쓰라린 상처에 신경을 쓸 수 없었다. 헤어지는 일은 아픈게 당연하기때문에 누구도 유별나게 생각하지 않았다. 



"좀 늦었네."

동료가 건네는 말을 씹었다. 느긋하게 준비한게 화근이었다. 뉴스 앵커자리는 제 것이 아닌지 오래였고 라디오마저 점점 하락세를 보이는 와중이었기에 윤영화는 이 일에 더 이상 흥미가 가지 않았다. 오직 문선모 생각으로 가득 찬 머리를 식히러 담배를 물었다. 눈 앞으로는 밝게 웃는 귀여운 선모와 어제 그 차디찬 문선모가 동시에 그려졌다. 오버랩되는 착시에 세상이 핑 하고 돌았다.



어디 아프냐는 말을 지겹도록 들었다. 아프면 뭐, 집에 보내줄 아량도, 능력도 없는 것들이 조잘조잘 시끄러웠다. 문선모는 또 한도경 집에서 잠을 청하겠지, 하는 생각에 다다르자 열이 뻗쳤다. 집에 남은 문선모 짐을 어디 숨겨둬야겠다는, 그런 유치한 생각을 하는 영화였다. 선모와 만나고 나서 눈에 띄게 여자의 연락이 줄었다. 제가 끊은 것도 있지만 이상하게도 여자가 꼬이지를 않았다. 당연한 일 이었다. 누군가와 진심으로 사귀게 된다면 다른 사람들과 연락이 줄어드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윤영화는 아니었다. 지금까지 단 한번도 진심으로 누구를 사랑하지도, 사랑받지도 않았기 때문에. 참으로 불쌍한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동정과 연민을 받지 않았다. 아무도 윤영화를 불쌍히 여기지 않았다. 문선모만 빼고. 문선모는 윤영화가 너무 불쌍했다. 영화는 늘 혼자였고 아무리 잘난 체를 해도 그 모습은 보잘 것 없는 알맹이를 가리기 위한 껍질이었다. 



***


윤영화는 그 사실을 아는 문선모가 두려웠고 또 고마웠다. 문선모를 처음 만난 그 날부터 지금까지 영화는 문선모라면, 어쩌면 이 사람이라면 진짜 사랑을 하게 될거라고 생각했었다. 헤어진 지금까지도. 하지만 문선모는 다르겠지. 선모는 이미 내 사랑에 지쳐있겠지. 이제 질리고 물려서 나는 거들떠보지도 않을거라고. 다시 삽질을 시작했다.



"짐은, 씨발..."

하필 비밀번호도 선모의 생일이었다. 텅 빈 집에 남은 흔적은 전부 추억이었고 기억이었다. 하나하나 치우면서도 이건 앵커님이 사준 옷, 이건 앵커님이랑 맞춘 신발, 하다보니 일의 진행은 더디기만 했다. 두 손으로 얼굴을 덮고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버렸다. 할 수 있는 일이 그것 뿐이었다. 이제 서로 언성을 높여가며 싸웠던 일 마저도 그리웠고 그 때로 돌아가고싶어 애처럼 떼를 썼다. 창 밖은 어두워졌고 문선모는 차 소리만 들어도 윤영화가 집에 왔다는 것을 알아챘다. 이렇게 익숙해졌는데, 제 일부라고 생각했던 사람을 너무 쉽게 떼어낸 것은 아닌지 걱정이 들었다. 



"문선모...? 아, 짐 치우려고."

"앵커님이 짐 빼라며."

대강 정리되어가는 집과 짐에 영화는 괜히 마음이 더 씁쓸해져갔다. 이제는 다시 잡으려 손 조차도 뻗을 수 없기에 헛된 노력과 낭비는 하지 않았다. 그러는 것이 서로에게 어울렸다. 



"야, 그건 가져가지마."

"왜요. 내가 사온건데."

괜한 태클을 건 것이 맞았다. 그 화분이 문선모를 잡을 마지막 구실이었으니까. 이미 다 죽은 화분이 뭐가 아깝다고. 다 죽은 사랑이 뭐가 아쉽다고.



"내가 키웠잖아."

"허, 지금 그게 말이라고... 그래요, 앵커님 가지던가."

"유치한 스티커나 붙여놓고 말이야."

"좋다고 난리친게 누군데요!"

결국 화분이 떨어졌다. 흙과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우리의 이름이 적힌 스티커는 정확히 반으로 갈라졌다. 왜 우리는 마지막까지 좆같아요? 선모의 물음에 영화는 답을 할 수 없었다. 깨진 화분을 조심하라는 말도 할 수 없었다. 이게 다 빌어먹을 타이밍을 놓쳤기 때문이다. 문선모는 발에 박힐 파편들이 두렵지도 않은지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쿵 소리가 나게 문을 닫아버린 그 뒤로 윤영화는 한참을 서있었다. 이제 정말 끝이라서. 


***


이런, 글.

R 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

댓글

SNS 계정으로 간편하게 로그인하고 댓글을 남겨주세요.